미술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자기도 모르게 이 작품이 구상인지 추상인지를 구분한다. 본능적으로 작품에서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형태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를 잘 표현했는지 못 했는지 평가하기도 하고, 형태가 잘 찾아지지 않을 때는 도대체 이 작품이 무엇을 나타낸 건지, 어떤 숨은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보기도 한다.
이런 관람객들에게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작품은 그저 당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직육면체로 쌓인 공사장에 있을 법할 벽돌들, 벽면에 차분하게 배열된 형광등들, 혹은 그럴듯하게 색칠된 구리나 스테인리스스틸 등의 산업재료를 ‘미술관’ 바닥이나 벽에서 마주한다면 그것들은 분명 미니멀리즘 작가의 작품일 것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관람객들이 작가의 감정이나 주관성보다는 앞에 놓인 물리적인 대상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관람객들은 작품을 해석할 필요도 없고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다. 그저 나와 한 공간 속에 자리한 원재료의 특징이 거의 그대로 살아 있는 예술품의 질감, 무게감, 색조, 긴장감 등을 감상하는 것이다.
홍콩 페이스 갤러리의 조엘 샤피로(Joel Shapiro, 1941-)의 작품들 역시 이러한 미니멀리즘 미술의 특징을 가졌다. 그의 작품 역시 많은 미니멀리즘 작품이 그렇듯 작품의 주재료인 직사각형 나무 조각으로 정의되곤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샤피로의 작품들은 미니멀리즘과 거리를 둔다. 그는 조각을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로 구성했지만, 이전 미니멀리즘 미술이 추구한 차갑고 은유할 수 없는 형태가 아닌 걷고 달리고 비틀거리는 듯한 인간 형상으로 만들었다[그림1]. 그리고 그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무 조각을 들고 이렇게 저렇게 맞춰보는 공을 들이는 동안 작품에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담았다. 이는 이전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작품에 자신의 손길을 드러내지 않고 마치 공장 생산품의 설계자처럼 제작 및 조립 과정을 지정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자처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이다. 이러한 특성들로 그는 추상적이고, 물질적 존재감을 강조하는 오브제에 집중한 미니멀리즘 이후에 다양한 경향으로 확장된 ‘포스트’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졌다.
그의 조각들은 홍콩 페이스 갤러리의 벽, 바닥, 천장에서 제한된 색칠을 하고 어딘가 위태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그림2]. 어떤 조각들은 얇은 다리 한두 개를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내디딘 채 천장에 매달려 있고[그림3], 또 다른 조각들은 머리를 기대거나 기어오르는 모습으로 어색하게 한쪽 벽면에 붙어 있다[그림4]. 이렇게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무너질 듯한 위태로움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무의 결과 형태를 만들고 지탱하는 이음새 부분은 관람객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그림5]. 어딘가 인간 형상을 한 샤피로의 조각에는 사람들의 해석과 감정을 끌어내는 약간의 색이 보태어져 있다. 그리고 빛을 통해 만들어내는 조각의 그림자들은 흰색 벽면과 회색 바닥에 저마다의 모양으로 드리워진다. 이러한 형상, 질감, 무게, 색, 명암을 품은 샤피로의 조각은 같은 공간을 점유한 사람에게 묘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이 에너지는 관람객의 눈을 작품 속으로 향하게 하고, 정체된 마음에 서서히 새로운 감정을 불어넣는다.
PLACE 홍콩 페이스 갤러리
홍콩 센트럴에 위치한 H Queen's 빌딩 11층에 위치하고 있다. 안 글림처(Arne Glimcher, 1938-)가 설립한 미국 갤러리로 뉴욕, 로스엔젤레스, 런던, 제네바, 서울, 홍콩 등 전 세계에 갤러리를 운영하는 세계적인 갤러리이다.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위너와 함께 뉴욕의 3대 갤러리로 불린다. 현재는 창업자의 아들인 마크 글림처(Marc Glimcher, 1963-)가 회장으로 있다. 한국의 이우환, 이건용, 유영국도 페이스 갤러리의 전속작가이다.
칼럼 소개
홍콩에서는 가장 큰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열리고, 세계적인 옥션 회사들이 일 년 내내 프리뷰와 전시를 개최하며, 대형 갤러리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 작품을 쉴 틈 없이 선보인다. 그리고 홍콩에는 M+ 미술관과 홍콩고궁문화박물관 등이 위치한 시주룽문화지구, 시대에 상관없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HKMoA와 시각예술 복합문화공간인 K11Musea, PMQ, 타이콴 헤리티지, 전 세계의 유명 및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중소형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은 동서양의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살아 숨 쉬는 미술 도시이다. [미술도시, 홍콩] 칼럼은 미술교육자 원정연이 이러한 장소들을 방문하며 전하는 미술, 시각문화, 작가, 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정연
미술사/미술교육을 공부하고 미술을 통한 글쓰기를 강의했습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홍콩의 다채로운 시각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졸업, 서울대 사범대학 미술교육(이론) 박사 수료
- 강남대 교양교수부 강사, 서울대 사범대학 협동과정 책임연구원 및 창의예술교육과정 강사, 서울대 기초교육원 학부생 글쓰기 상담 튜터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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