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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의 영화칼럼] 환경문제와 계급의 설국열차 위클리홍콩 2022-08-05 09:24:12


감독 봉준호의 5번째 장편영화로서, 한국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크게 유명세를 가진 영화 ‘설국열차’는 그의 첫 영어 영화이기도 하다. 영어권 유명 배우들을 출연시키며, 영화 ‘괴물’에 등장했던 송강호와 고아성을 재차 등장시킴으로서 박스오피스는 물론 화제성까지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지구 온난화의 대책으로 전세계 각국들은 'CW-7'을 공중에 살포하며 냉장제 살포를 통해 지구의 대기온도가 적정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17년 후가 되어, CW-7의 부작용으로 지구에 빙하기가 오게 되고, 완전한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춘 거대한 열차만이 지구를 달리게 된다. 장편영화 ‘옥자’를 통해 환경문제를 거론하고, ‘괴물’을 통해 계급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함을 폭로하는 감독 봉준호는 설국열차에서 그의 비판을 계속 스크린에 영사한다. 

 

하나의 작은 사회이자, 인간들의 터전인 설국열차는 우리들의 사회와 다름없이 수없이 계급화되고 나누어지면서 충돌을 만들어낸다. 기차는 계급별로 칸이 나뉘는데, 열차의 앞 칸은 돈 많은 관광객, 즉 빙하기로 인하여 소유자본의 타격이 없는 상류층이며, 열차의 꼬리칸에는 가난하고 소유 자본이 없는 가난한 자들이다. 꼬리칸에 타 있는 그들에게는 ‘단백질 블록’이 주기적으로 배급되며, 단백질 블록은 소위 말하는 ‘바퀴벌레’와 기타 벌레들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꼬리칸에서는 공권력에 의한 사회적 탄압이 이루어진다. 총과 물리적 폭력이 동반된 탄압은, 꼬리칸에서 벌어지는 반란을 제압하려하지만 한정된 자원의 고갈, 즉 총알의 고갈이 꼬리칸 빈민들에게 발각 된 후, 꼬리칸에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열차의 앞 쪽으로 진격한다. 꼬리칸 사람들이 중간칸으로 진격하게 되고, 열차 속의 혼란스러움은 횃불과 어둠으로 이루어진다. 빈민들의 전투, 즉 최하위 노동계급의 반란은 중간칸에서도 승리하며 그들은 앞 칸, 즉 퍼스트 등급의 자리까지 나아간다. 

 

그들의 진격 속에서, 중간칸 너머의 있는 ‘학교’의 존재가 스크린 속에 나타난다. ‘학교’라고 불리우는 곳은 마치 ‘사상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선생이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이 아닌, 열차 속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사상교육’을 진행하며 꼬리칸 사람들은 학교에서 처음으로 ‘단백질 블럭’ 이 아닌 달걀의 존재를 알게 된다. 신선한 달걀은, 인간이 만들어 낸 ‘블럭’이 아닌 자연의 음식으로 여겨지며 중간칸 너머, 머리칸에서는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알게 된 꼬리칸 빈민, 남궁민수와 요나, 커티스는 분개하며 머리칸으로 진격하지만 남궁민수와 요나, 커티스가 서로 원하는 목적은 달랐다. 커티스는 꼬리칸 사람들에 대해 복수하기를 원했으나, 남궁민수는 열차로부터의 탈출을 원했다. 엔진실의 문 앞에서 그들은 의견이 충돌한다. 

 

엔진실 속의 상황은 꼬리칸보다 아늑했으나, 꼬리칸의 반란부터 엔진실까지의 진격까지 열차를 만들어 낸 ‘윌포드’가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또한 이를 통하여 엔진실 속에 숨겨진 ‘착취’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영화 초반에 잡혀간 빈민칸의 ‘티미’가 엔진실 바닥에서 살아있는 기계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노동력 생산을 위하여,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아동을 착취하는 상황에 대하여 관객들, 즉 상영관 (Theater)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분노하게 되나, 영화를 감상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실조차 알 수 없기에’ 분노할 수 없다. 이는 ‘영화’의 기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며, ‘감상’과 ‘사실’을 분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설국열차 속에서 이루어졌던 세뇌교육은 ‘열차는 숭고하다’라는 생각이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는데, 사실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착취’로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영화 속 빈민칸 출신들은 분노하게 된다. 


윌포트는 “애초부터 자리는 정해져 있어”라고 말하지만, 이 대사는 열차 속 특권층이 해 온 대사와 동일하다. ‘자리’라는 개념은, 맡은 바를 뜻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계급’을 지칭한다. 이 계급은 노력으로 인하여 변하지 않으며, 고착되어 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커티스는 자신의 한쪽 팔을 톱니바퀴에 넣고 부품이 되어버린 티미를 구출하며, 열차를 멈춰 세운다. 멈추는 과정에서 열차는 폭발하며 그 반동으로 열차의 문이 열리게 된다. 긴 터널 밖으로 나오게 된 열차가 사고가 나자, 살아남을 수 있던 것 머리칸 뿐이었다. 누가 살았는지, 살 수 없었는지에 대하여 영화는 명확한 메시지를 주지 않으나 요나와 티미가 살아나왔다는 것은 감독의 메시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괴물’에서는 남자아이만 살린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에서는 여자아이 요나와 남자아이 티미를 동시에 최후의 2인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그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 편으로는 ‘자급자족 가능한 움직이는 것’이 ‘노아의 방주’를 뜻하며 살아남은 2인은 ‘아담과 이브’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성경적 메타포를 지니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영화 속 결말에는 살아서 움직이는 북극곰이 스크린을 응시하는데, 이는 열차 속에서 이루어졌던 세뇌 교육이, 권력을 위하여 ‘실존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맹신이며 인간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하다. 현재 여름의 최고 기온이 기록적으로 갱신되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플라스틱 빨대와 비닐봉투는 물론, 석유를 태워가며 전력을 소비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환경오염에 동조할 수 있을까. 지구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인류가 멸종하게 된다면 멈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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