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건설 비서실에서 하루의 일과가 바쁜 수행과 회의 참석 등으로 개인적인 시간이 거의 없었던 오너 회장의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비서관이라는 직책은 원래 본인의 시간을 버리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Boss의 생활에 모든 일정을 맞춰서 행동해야 하는 직책이었다. 당시에는 많은 해외 현장에서 본사로 보고되는 문서를 텔렉스(telex)라는 통신수단으로 정부지침에 따라 암호화했기에 매일 새벽 쏟아지는 많은 문서를 일반문서로 번역한 후 체크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새벽 5시에 출근해야만 했다. 요즈음 직장인들이 이야기하는 칼퇴근, 주5일근무라는 개념이 나에게는 아예 없었다. 또한 사회에 나와서 처음 시작한 삼성그룹에서의 직장생활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침 7시부터 출근하여 영어 일본어 수업, 거래선과의 저녁 약속으로 자정이 되어서야 퇴근하였다. 그리고 사생활이 절제되고 단체에 얽매인 유니폼 생활은 대학 3학년 때부터 시작한 ROTC와 군복 생활, 넥타이 차림의 직장생활을 거치며 약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유원건설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1983년 9월 1일이었다. 직책의 성격상 결혼상대자를 만나볼 시간적인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이웃에 사시던 먼 친척 아주머님이 모친에게 주위에 참한 신붓감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연락을 하셨다. 상대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강원일보사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고 있으며, 특별휴가를 내어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춘천에서 서울대학병원까지 진찰을 받으러 올라온 여기자라고 소개를 하였다. 당시에 이런저런 상황으로 해외 근무를 곧 나가야 할 형편이었고 나이도 결혼적령기였기에 가급적이면 한번 만나보고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 아픈 어머니의 진료를 위하여 휴가를 내고 서울에 올라온 사람이라면 효심이 지극하리라 확신했고, 그런 사람이면 내 어머니도 잘 모실 거라는 생각에 한번 만나보기로 작정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도경 기자는 신문 기사 거리를 매일 써야 하는 직업적인 의무감이 발동하였고, 상대방을 만나서 '맞선의 실태'에 관한 생활칼럼을 한번 써보기로 마음먹고 장난삼아 맞선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맞선을 위해 일부러 서울에 올라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그녀는 이틀간의 특별휴가를 잘 활용했던 것이다.
맞선 자리에는 정 기자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측에서는 작은아버지와 본인이 참석하기로 결정하였고, 급작스럽게 어레인지하여 작은아버지의 직장 옆 광화문 찻집에서 맞선을 보게 되었다. 양가가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에 어르신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단둘이 남아서 어색한 대화를 시작하였다. 워낙 이런 자리에 익숙지 않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약간 서먹서먹하였다. 이때 내가 시켜놓은 음료수(핑크 레이디)를 상대방 정도경 기자가 부주의로 테이블 위에 쏟아서 정기자의 치마와 내바지를 젖게 만든 순간적인 실수가 갑자기 발생하였다. 이런 실수로 인해 정기자가 내게 거듭 미안함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상대방과의 서먹서먹한 상황이 오히려 대화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또한 그 당시 남성적인 직업인 여기자의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강원도 인제 출신의 순진하고 수줍음 잘 타는 여성으로 정기자를 잘못(?) 생각하게 되었다.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함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의 인상이 신문기자의 딱딱한 이미지가 아닌 부드러운 여성으로 느껴지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그날 처음 만난 날부터 소위 남들이 이야기하는 뭔가 불꽃이 서로에게 튄 것 같았고 단점보다는 긍정적인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서울에 체류 중인 이틀 동안 계속 상대방과 만났고 춘천으로 정기자가 돌아가고 난 뒤에는 주말마다 일과 후에 호반 도시 춘천까지 고속버스로 내려가서 상대방의 모교인 춘천여고 교정, 직장 강원일보사와 아름다운 호수 공지천 등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기고 늦게 서울로 올라오기가 일쑤였다. 정기자를 만난 후부터는 나의 현재의 상황 그리고 미래의 꿈들을 이야기하며 신기하게도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모든 미래의 꿈을 전부 긍정적으로 받아주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달콤한 대화만이 상대방과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굳이 흠 잡힐 대화를 할 필요가 없었다.
결혼 후 아내로부터 들었던 원망은 데이트할 때 남편이 자기에게 전부 약속했던 것들을 대부분 공수표로 날려버렸다는 것인데, 상대방을 그 당시에 나의 배우자로 꼭 잡아야겠다는 집념으로 '립서비스'를 많이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처녀총각들이 결혼 전에 흔히 저지르는 통속적인 선의의 거짓말(white lie)을 나는 총동원했던 것이다! 더구나 결혼과 동시에 동반 출국하여 해외 생활을 하겠다던 약속을 회사 사정을 핑계로 지키지 못하고 혼자서 인도네시아로 출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큰 야망을 갖고 임하던 기자 생활을 결혼과 동시에 접게 만든 후 첫아이의 임신 중인 1년 동안 문화촌 달동네 단칸방에서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감옥(?) 같은 생활을 강요한 중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실 가정 환경상 뼛속까지 남성 위주의 사고를 지녔고, 아들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보상심리가 강했던 나는 배우자에 대한 배려와 애정 표현에는 아주 인색했던 빵점 남편이었다.
아무튼 처음 만난 날부터 두 달만인 1983년 11월 6일에 결혼을 군사작전같이 초고속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칵테일 음료인 Pink Lady 사건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된다.
아직도 짝을 찾지 못한 아들에게 Pink Lady로 작전에 성공한 아빠의 배우자 선택 비법을 알려줘야겠다.
<다음호 6탄 [인도네시아 파견]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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