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부터 중동의 석유 수출 국가들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주요 산유국 중 사우디아라비아는 내부적으로는 미국 메이저 오일회사와 협력하여 초창기에 많은 투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자국의 산유 관련 투자설비를 보호해야 할 필요로 사우디지역에 지하왕궁, 군사시설, 병원, 공항, 항만,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사업을 미국공병단(Corps of Engineer)중동지역단(Middle East Division)이 감리하는 형태로 중동지역을 개발 중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한국지역의 미국공병단(Far East Division)과 협력하여 한국의 군사시설 공사 시행에서 상호신뢰를 쌓았던 현대, 삼환, 대림, 유원 등의 주요 한국계 건설회사들도 중동지역에 진출하여 오일달러 획득으로 엄청난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다.
삼성에서 바쁜 나날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어느날 유원건설의 윤영로 비서실장으로부터 갑자기 점심을 같이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나의 삼성 비서실 파견 근무 중에 경영기획팀 사수였던 당시의 윤영로과장이 유원건설 비서실장으로 스카웃 되어서 떠난지 1년 후에 미국 지사장으로 내정된 상태에서 후임을 물색하던 중 본인을 유원건설 최효석 회장에게 수행비서로 천거하였다. 사실 유원건설은 나에게 생소한 회사였지만 윤실장과 몇 번씩 만나면서 중동 건설시장의 호황과 오너의 훌륭한 인품 그리고 비서실장으로서 해외를 수행하며 경험하고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원래 나의 로망이었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꿈꾸게 되었다.
"You are the best One!"이라는 유원건설 회사명도 나에게는 신선한 의미로 들려왔다. 멋진 오너의 회사작명이라 생각했으며 직접 만나보진 않았지만 오너에 대한 좋은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해외 건설사업이 호황이니 건설회사마다 신입사원이나 경력사원을 대기업으로부터 대량 스카웃하는 현상이 지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직장이동은 삼성맨으로서 나름대로 인정받았고 상사나 동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한국 제일의 기업을 떠나서 신생기업인 건설업체의 비서실에서 비서업무를 해야 한다고 하니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미지의 직장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인 정보도 없이 새로운 출발을 해야 했기에 비서로서 국내외의 많은 건설 현장에 오너를 수행해야 할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제일 중요한 인물인 최효석 회장을 우선 만나보고 싶어 하던 차에 윤 실장이 하필이면 점심시간으로 최 회장과의 면담 시간을 정하였다.
윤 실장의 안내로 회장 집무실에서 최 회장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셨고, 아버지같이 편안한 모습으로 이것저것 신변에 관한 대화를 이끄신 후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윤 실장과 짜장면을 시켜서 집무실에서 같이 먹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소탈하시고 대화에서 감추는 게 없으신 분이라고 금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짜장면만 먹고 별다른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는 가벼운 미팅 후 헤어졌다. 며칠이 지난 후 윤 실장으로부터 최 회장께서 다시 한번 나와 점심을 같이하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는 회사 근처 매월이라는 일식당에서 간단한 스시정식을 사주셨고, 재미있게 고향(고성) 촌사람 이야기를 해주셨다. 전혀 윗사람의 권위 의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시며 유원에 와서 같이 일해보는 것을 한번 고려해 보라고 하셨고, 최 회장의 면전에서는 우선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윤 실장도 며칠 뒤 현재의 삼성 근무조건보다 파격적인 조건을 공식적으로 제시하였다. 삼성 급여의 약 2배 그리고 직급도 삼성에서는 과장이 되려면 5년 정도 더 기다려야 하는데 1년 후 과장으로의 진급 조건이었다. 가족들과 며칠간의 상의 끝에 모험을 무릅쓰고 이직을 하겠다고 드디어 결정하였다.
며칠 뒤 사직서를 근무하던 제일합섬 인사담당자에게 제출하자 즉각적으로 인사 담당 중역이 면담을 요청하였고, 절대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사표 수리가 두달 동안이나 지연되었다.
양쪽 회사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나를 평소에 아껴주셨던 엄경호 대표이사(육사 8기)께서 친히 불러서 본인의 의사를 다시 한번 물으시고 조건부 사표 수리를 해주셨다. 이직 후 1년 안에 다시 삼성으로 돌아오면 받아주시겠다는 조건(?)이었다. 엄 대표는 나의 제일합섬 근무 시절에 사업본부로 들어오실 때마다 본부장을 찾지 않으시고 큰소리로 먼저 김운영 사원을 찾으셔서 선배들은 나를 '김 본부장'이라 부르며 놀렸었다. 결국 나는 유원으로 이직을 감행하였다. 그렇지만 이직 후에도 시간 날 때마다 엄 대표를 틈틈이 찾아뵈었다. 특히 해외 출장 전 인사차 찾아뵈면 내가 방문할 나라에 살고있는 외국 친구들에게 직접 타이핑을 쳐서 소개장을 만들어주신 것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나중에 내가 독립하여 개인사업을 시작하고 오너가 되어 직원을 직접 채용해 보니, 무척 신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 가르치고 정을 주었던 직원이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고 했을 때 엄경호 대표같이 해줄 수 있는 윗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6.25 전쟁터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셨고, 대한민국 섬유산업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신 고인의 명복을 빈다.
<다음호 6탄 [중매일기(a pink lady)]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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