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유명한 아티스트인 아니타 무이(梅艷芳)는 1987년에 본인이 홍콩에서 오퍼상을 생업으로 일하던 초기에 우연히 연결이 되었다. 보따리 장사 초기라 특별한 수익이 없는 상태였을 때 조그마한 상품 하나가 당시에 유명한 홍콩 가수와 패션 디자이너를 통해서 연결 시켜주었다.
주재원 생활을 하다가 독립하여 당시에 홍콩중문대학교에서 배운 중국어를 무기로 홍콩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산 제품을 팔아보겠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돌아다녔던 시절이었다.
섬유제품의 경우는 바이어들에게 샘플을 꼭 보여줘야만 오더를 받을 수 있으니 무거운 샘플 가방을 메고 지하철로 이동할때 지하철 관리원이 부피가 큰 가방을 들고 탑승을 하지 못하게 하여 할 수 없이 버스로 이동해야만 했다. 홍콩은 그당시 여름이 긴 아열대 기후라서 섭씨38도의 습도가 90%정도인 후덥지근한 날씨로 땀이 비오 듯 쏟아지고 뜨거운 공기에 숨이 막혀버릴 듯하였다. 에어컨이 없는 버스에 직행 노선이 없는 공장지역까지 1시간 씩 이동하여 찾아가는 바이어 상담은 정말 힘든 일이었지만 그때는 오로지 “불가능은 없다”고 굳게 믿었던 젊은 나이였다. 한국의 세실실업이란 중소기업체가 만든 Spangle(스팡글제품)을 홍콩에 처음으로 런칭하려고 뛰어다녔다.
처음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서울의 지인들과 연락을 하였던 업체 중에서 세실은 당시 미국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Evening Dress 제작용 스팡글 방울을 달아 만든 원단제품으로 매출을 급격하게 올리고 있었다. 동남아에는 아직 시장개척을 위한 제품홍보가 되어있지 않았던 차에 사주인 장사장이 홍콩을 방문하여 이전에 삼성(제일합섬)에서 잠깐 일해본 경험이 있는 본인에게 특별히 요청하여 마케팅을 시작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상당히 어려운 아이템이었기에 판매가 부진하였다. 특히 일반 섬유제품의 수출가격은 야드 당 미화1불이었으나 스팡글 제품은 10배의 가격이었으니 팔기가 너무 어려운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수량과 액수에 관계없이 판매를 해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헝그리 정신'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홍콩시장 마케팅을 위하여 유명 디자이너를 컨택하기로 마음먹고 디자이너 협회를 방문하여 당시의 유명한 디자이너인 베니 영,월터 마, 다이에나 프리 ,비비안 탐 ,에디 라우 등의 연락처를 얻은 후 한명씩 샘플을 들고 상담차 방문하였다. 그중에 아니타 무이의 개인 디자이너 에디 라우(Eddie Lau)와 홍함에 있는 개인소유 디자인 하우스에서 1시간을 기다려서 마침내 어렵게 상담을 하였다. 특이한 제품에 관심이 있었던 에디 라우는 즉석에서 15야드의 무상 샘플을 주면 자기가 샘플 의상을 만들어보겠다고 하였는데, 물론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샘플구입이었다.
한 달 후 서울본사에 요청한 샘플을 받아서 다시 낑낑거리며 땀에 흠벅 적셔진 티셔츠를 입은 상태로 15야드 샘플을 본인이 직접 배달하여 에디 라우에게 건네주니 고생했다고 하며 기대하지 않았던 홍콩달러 1,000불(미화 약120불)을 샘플비로 주었다. 이 돈은 본인이 이 아이템으로 처음 벌었던 최초의 수입금이었다. 너무 기쁜 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다른 디자이너와 의상제조업체에 판매를 위해 샘플을 짊어지고 열심히 계속적으로 돌아다녔지만, 신규제품이라 파티문화가 많지 않은 홍콩에서 판매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약 3개월이 지나서 출근하는 길목인 MeiFoo MTR (지하철)복도에 들어선 순간 놀라운 광고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니타 무이가 입고 찍은 콘서트광고 의상이 모든 지하철역을 뒤덮고 있었다. 에디 라우가 디자인하여 아니타 무이가 입고 찍은 스팡글 제품의 의상이었다. 대박이었다!
홍콩 전역에 있었던 이 광고가 계기가 되어 그때까지 제품을 잘 모르고 있었던 바이어들에게 모든 스팡글 제품에 대한 마케팅이 너무나 쉽게 되었다. 컬러로 광고내용을 프린트하여 의상 제조업체를 찾아다니며 설명도 필요 없이 오더를 받았다. 또한 홍콩 주요 텔레비젼 방송사인 ATV가 주관하는 '미스 아시아' 대회에 회사의 스폰서 이름을 올렸으며 제품 스폰서업체 대표로 Baptist University강당에서 거행되는 미스 아시아 선발대회의 현장에 참석하였으며 회사이름(Silver Star)이 자막처리되어 나오는 것을 본 순간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텔레비젼의 영향력과 스타의 유명세가 제품판매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때부터 몸소 느끼게 되었다.
중화권 및 동남아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니타 무이 덕분에 후일 대만에까지 스팡글 제품이 판매되었고 이때에 연결된 에이젼트를 통하여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포일제품의 원단까지 수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유명스타를 이용한 TV광고의 위력은 대단했다.
30여 년이 지난 최근에 홍콩 영화관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암과의 사투 끝에 요절한 아니타 무이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가 상영된다는 극장 프로를 보고서야 구글검색에 찾아보니
아니타 무이가 당시에 본인이 제공한 원단으로 에디 라우의 디자인으로 만든 무대의상를 입고 찍은 사진이 나와 있었으며 홍콩 사틴의 헤리티지 박물관에도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였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홍콩 헤리티지 박물관을 방문하여 에디 라우가 디자인한 아니타 무이의 무대의상 작품 앞에서 사진 한 장을 같이 찍고, 방문 기념으로 아니타 무이의 무대의상 작품집을 손수 구매하였다.
아니타 무이의 사후18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영화를 2021년 11월12일에 개봉영화관에서 아내와 같이 관람하면서 애디 라우 그리고 아니타 무이와의 기묘한 인연을 추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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