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는 예로부터 관혼상제에 빠지지 않는 생선이었으며 조깃살로 만든 죽은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의 영양식으로 애용된 영양만점의 물고기이다.
한때 명태가 동해안을 대표했다면 조기는 서해안에서 첫 손에 꼽히는 물고기였다.
최근 서해 흑산도 인근에서 오랜만에 조기가 많이 어획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을 보니 헛말은 아닌가 보다.
건강에 좋고 기운을 북돋워 준다는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인 동중국해에서 겨울을 나고 4~6월께 산란을 위해 서해 연평도 근해까지 북상한다.
양력 4월 20일께인 곡우(穀雨) 때면 조기떼들은 어김없이 변산반도 입구의 칠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칠산 어민들은 법성포 건너편 구수산의 철쭉이 떨어지거나 인근에 있는 섬 위도의 늙은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참조기가 알을 낳을 때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정확하게 대를 맞추어 모이는 생선으로 여겨진 조기는 이 덕분에 어부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조상들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을 “조기만도 못한 놈”이라며 욕을 하기도 했다.
조기와 관련된 우리 속담에는 또 몹시 소란스럽다는 듯의 강경장(江景場)에 조깃배 들어왔나?라는 말이 있다.
금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는 강경읍에서 가장 큰 시장인 강경장은 조선시대 평양장, 대구장과 더불어 3대 장터의 하나였으니 조깃배가 들어왔을 당시 강경장터를 오갔을 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간다.
이 때문에 몹시 소란스러울 때 다른 지역 사람들까지도 “강경장(江景場)에 조깃배 들어왔나?”며 한마디씩 했던 것이다. 이곳이 어찌나 번창했던지 “은진은 강경으로 꾸려 나간다.”는 말까지 생겼다.
박학다식- 조기잡이의 시조는 임경업장군
동국여지승람의 석수어(조기)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조기는 400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어획되어 식용으로 이용된 중요한 물고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기잡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재 조기 어장으로 유명한 연평도의 조기 어업에 관한 전설의 기록이 전할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에 청나라가 명나라의 뒤를 이어 중국의 통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때 조선은 예전의 친분 때문에 명나라를 돕고 있었는데, 특히 영상인 최명길(崔命吉)과 평안도 병마절도사인 임경업(林慶業)은 비밀리에 주문(奏文)을 명나라 조정에 밀송한 일이 있었다.
청의 위세가 드높아 가는 가운데 이 사실이 드러나 임경업 장국은 명나라로 도망을 가게 되었다. 배 1척을 준비한 후 스님으로 변장하여 황해도로 향하는 화주승의 배라고 속여 삼포(서울 마포)를 출항하였다. 황해도 부근에 이르자 임경업 장군은 승복을 벗고 명나라로 향할 것을 명령하자 선원들은 대경실색하였다. 중국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선원들은 배 안에 있던 식량과 식수를 몰래 바다에 버렸다. 임경업은 하는 수 없이 당시 제일 가까운 연평도에 일시 상륙하여 엄나무 발을 이용하여 하룻밤에 수천마리의 조기를 잡았다고 전한다. 이것이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초이다.
지금도 연평도에는 임경업 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매년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출처: 국립수산과학원
제공: 수협중앙회 홍콩무역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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