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볕이 따스한 센트럴의 오후,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만다린 오리엔탈 정문을 나서는 P를 발견했다. 모임이 있었는지 그룹과 함께 있던 그녀가 나를 보더니 재빨리 그룹에게 인사를 하고 다가왔다.
"다들 쇼핑을 간다는데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하던 참인데 잘 나타나셨네요! 저랑 조금만 걸어가 주실 수 있죠?"
"나가기 싫어서 피한다던 그 모임 멤버들 비슷해 보이는데, 아닌가요?"
"네, 맞아요. 6개월이나 곧잘 피했는데 연말모임에는 꼭 나와야 된다고 이메일, 전화, 문자까지 총동원해서 강요를 해대잖아요. 할 수 없이 또 끌려나왔죠… 하도 추궁을 하는 바람에 새해에 또 만날 약속을 해버렸으니 어쩌면 좋아요? 전 정말 줏대가 없어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친한 친구 때문에 나가기 시작한 그 모임은 친구가 미국으로 떠나자 따분한 골칫거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P를 뺀 멤버 전원이 여유롭고 한가한 50대 부인들이라 관심사나 취향까지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들은 그룹에 아직 30대인 P같은 영블러드가 있어 업 된 분위기를 반가워했지만 모임이 있는 날 P의 컨디션은 저조할 따름이었다.
주로 대기업 간부, 사업가, 뱅커, 고위직 공무원이 남편인 멤버들의 집에 갔다 온 날이면 부쩍 남편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자신을 발견한 P는 모임에 그만 다니기로 했다. 갖가지 이유를 대며 연락을 용케 피하다 멤버들의 융단공격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재미도 이득도 없는 모임에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또 다시 12월이 오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처럼 우리 곁에 다가온 파티시즌. 다양한 이유로 분위기 따라 휩쓸리다 정신을 번쩍 차려보면 어느새 음력설(!)인 경우가 허다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없는 예산과 시간을 쪼개가며 연말모임에 나가고 선물을 챙긴다고 매년 최선의 유난을 떨어왔건만 자살과 이혼, 가정불화는 왜 그리 늘어만 가는 것인지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있다. 넘치는 술잔, 럭셔리한 선물, 슬쩍 내미는 봉투를 주고받는 대신에 식구끼리, 부부끼리, 친구끼리, 동료들끼리 주고받아야 할 것은 정작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의 1년을 돌아보면서 이런 의문에 대한 솔루션을 찾기 위해선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이건만 사방이 파티무드에 흥분해 떠들썩한 마당에 그런 과감한 선택을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술잔을 부딪치는 대신 속마음을 부딪치고, 선물대신 진심을 전하고, 봉투대신 뒤늦은 사과를 건넬 기회는 그렇게 또 다시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다 기약 없는 훗날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시장에서 한눈을 팔다 엄마를 잃고 졸지에 미아가 돼 시장 근처에서 냉차를 팔던 아주머니의 눈에 띄어 그 집에서 밤을 보내고 경찰서로 넘겨진 적이 있었다. 세상이 지금보다는 무척 순박했던 시절이었다. 아주머니가 사는 판잣집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고개를 한참이나 올라간 꼭대기에 있었다. 병색이 가득해 누워있던 남편이 땅바닥이나 다름없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웃는 낯으로 아내를 맞았다. 검정교복을 입은 아들과 딸이 함께 집에 돌아오더니 서로 저녁을 차리겠다고 실랑이를 했다. 온 식구가 둘러앉은 밥상의 대화는 잊었지만 그들의 웃는 얼굴만은 기억에 생생하다. 미아답게 울고 불면서 엄마를 찾기는커녕 부지런히 눈을 굴려가며 식구들을 쳐다보기 바쁜 나는 호기심이 극에 달해 슬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판잣집에 사는 데 왜 자꾸만 웃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둥그런 양은밥상에 모여 앉은 가족의 웃는 모습. 그들은 물건이나 말 몇 마디로 보여줄 수 없는 무엇을 나누고 있었고 그 평화로운 에너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판잣집을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안식처로 만들고 있었다. 멋지게 포장해서 줄 것이 없고, 몸이 아파서 대신 힘을 써주지 못해도 웃을 수 있다는 신기한 가능성은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가슴에 평생 못 잊을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거품을 모조리 걷어낸 진심어린 마음이 발산하는 에너지처럼 너와 나 사이의 벽을 허물고 단절을 녹여주는 것은 없다는 교훈과 함께.
한해를 접는 길목에서 자신을 위해 선행을 하나 하고 싶다면, 나를 채워주는 에너지를 양껏 공급해주자. 서로 전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단호한 의사표현으로 마침내 모임에서 해방된 P는, 요즘 광동어를 배우며 알게 된 인연들 덕분에 모처럼 신바람이 난다고 한다. 그렇듯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관계는 남은 기운까지 쪽쪽 빨아먹어 진을 빼는 뱀파이어 스타일 관계와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 애써서 척하지 않으면서 솔직담백하게 이어갈 수 있는 인연을 늘여가는 일은 마음을 든든하게 만드는 보약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인연을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고 피천득 선생의 <인연>에 나오는 구절. 정말이지, 아니 만나야 좋을 인연 하나를 깔끔히 정리하고 새로운 인연을 내 삶에 초대하는 것으로 올해를 마감해보면 어떨까. 서로 마음이 통해서 맺어진 인연으로 충만하고 다채로워지는 삶이야말로 신비로운 끌어당김의 법칙이 살아 숨쉬는 드림 라이프일 것이다.
<글·베로니카 리(veronica@coaching-z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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