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구현된 서양사법제도홍콩은 영국왕실이 다스리는 식민지로써 대체로 영국의 법률방식을 따랐다. 홍콩정부가 중심지역 일대를 중점적 관리지역으로 선정한 후, 곧 법원과 감옥을 건축한 것은 영국사람들이 사법제도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Jackson Road 8호(昃臣道)에 위치한 입법회 빌딩이 예전의 홍콩최고법원이다.
최고법원의 설립 1844년 설립된 홍콩의 최고법원은 처음에는 Wellington St.(威靈頓街)의 빌딩 안에 있다가 1848년 Queen's Way Road로 옮겨졌다.
제8대 홍콩총독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은 1894년 소그룹을 결성해 홍콩 중심부를 새롭게 매립하는 건축방안을 연구, 새 법원빌딩건축을 제안했다. 상례국(현 입법회)은 마침내 1898년2월28일 빌딩 건축을 결정했다.
최고법원빌딩은 홍콩법치사회의 상징을 말해주는 Statue Square(皇后像廣場)에 인접해 있으며, 이웃에 군사정치부빌딩이 즐비한 중심지역의 요충지에 위치했다.
홍콩정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버킹엄궁전의 정문과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 그리고 해군사령부의 아치형문을 설계한 영국연방정부 구매처의 건축사 아스톤 웹(Aston Webb)과 인그리스 벨(Ingress Bell)에게 설계를 맡긴 것은 정부가 이 빌딩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보여준다.
본래의 계획에 따라 빌딩의 정문은 Statue Square를 향하고 있는데, 원래 첫 도면에는 방향이 정 반대였다. 이를 몇 번을 수정한 후에야 비로써 건축설계도가 구체화 되었고, 1900년 마침내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공사청부상인 진아당(陳阿棠)이 1904년 공사기간 중에 사망했고, 게다가 석재가 부족해 공사 진행속도가 늦추어졌다. 빌딩은 12년 후에야 겨우 완공 되어 홍콩 건축사상 공사기간이 가장 긴 건축물중 하나가 되었으며, 빌딩의 준공기념석에는 공사청부상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최고법원의 건축특색빌딩의 기반은 백그루나 되는 삼나무 그루터기로 만들어졌으며, 1903년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홍콩총독 헨리아더 블레이크(Henry Arthur Blake)는 행사에서 "이 우뚝 솟은 장엄한 돔형식의 빌딩은 은혜와 위엄이 있으며, 청렴결백하여 정직하고, 공평무사하게 법을 집행하는 성전으로써 가장 적합합니다. 이 기반과 초석에서 완선(完善)한 사회가 비로써 건립되고, 번영할 뿐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빌딩의 주춧돌이 있는 곳에 당시 홍콩의 신문 몇 부를 함께 묻었고, 기념으로 각종 화폐가 제작 되었다.
최고법원빌딩은 1912년 1월 15일 홍콩총독 프레데릭 로가드(Frederick Logard)에 의해 개관됐다. 이 웅장한 빌딩은 2층 건물로 고급의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예술과 건축풍격을 모방한 서양의 신고전주의의 양식에 중국전통 건축특색을 접목시켜 홍콩의 아열대기후에 적합하게 건축되었다.
빌딩의 사방은 이오니아양식의 원기둥이 둘러싸고 있으며, 발코니와 아케이드가 설비되어있고, 양쪽 처마에는 중국티크원목의 버팀목이 평평하게 깔려있어 독특한 풍격을 보여준다. 중앙 돔 꼭대기에는 청동으로 만든 튜더왕관(영국왕실의 에드워드 7세 때부터 엘리자베스여왕 2세 때까지(1902~1953)사용한 왕관)이 조각되어있고, 정문 현관위의 삼각형 미문에는 최고통치자의 명사 「Dieu Et Mon Droit」(신과 나의 권리)가 새겨져있다. 미문꼭대기에는 정의의 여신 테미스(Themis)를 상징하는 조각이 세워져있어 이 건물의 우의(寓意)와 기능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 준공초기 영문「Court」와 광동어「葛」의 발음이 비슷하여 당시 어떤 사람들은 최고법원빌딩을「대갈루(大葛樓)」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고법원의 과거와 현재
빌딩 내에는 모두 3개의 법정이 있고, 지하에는 토지등록사무소와 사법사무관 사무실 그리고 죄인 접수실이 있었다. 그 후 빌딩은 여러 차례 재건하여, 모두 일곱 개의 법정을 지었다. 당시 법원은 수석사법장관 한 명과 최고법원법관 한 명이 있었다. 만약 어느 누구든지 그들 중 한사람의 판결에 대해 불복한다면 두 명으로 구성된 합의법정에서 상소 청문이 진행되었다.
일제강점시기 최고법원빌딩은 일본군의「홍콩헌병총사령부」로 징발되어 건물 앞에는 초소가 세워졌고, 건물 안에도 역시 고문실이 지어졌다. 동쪽 벽은 일찍이 전쟁의 화염에 의해 파손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최고법원의 용도는 회복되었지만, 1978년 지하철 공사로 인해 빌딩은 문을 닫고 개수공사를 해야 했다.
최고법원은 먼저 빅토리아법원(전 프랑스정도회빌딩)으로 이사했고, 1984년 다시 깜종 법원도(金鐘 法院道)로 주소를 옮겼다. 게다가 빌딩이 본래 있던 곳은 1984년 법정고적이 되었고, 1985년엔 입법부 의사당으로 바뀌었다. 입법부업무와 통합하기 위해 빌딩내부는 1층의 법정을 회의홀로 바꾸는 큰 공사를 하였다.
Statue Square를 향하고 있는 중앙입구(죄인전용 출입구)는 현재 폐쇄되어 있다. 빌딩 내에 있는 죄인 접수실과 1층 법정을 연결하는 육교는 「저승으로 가는 다리」라 불리며 예전 죄인들이 심판을 받으러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곳으로 현재 보존되어 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입법회빌딩」으로 개명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서, 최고법원빌딩은 95년 동안 과거 사법기관에서부터 현재 입법최고권력기관으로써 홍콩법치사회의 상징이다. 1912년 수석사법장관 프랜시스 피고트(Sir Framcis Piggott)는 개막행사에서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령 훗날, 빅토리아성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고, 항구는 충적된 진흙에 의해 막히고, 홍콩 회의소가 무너져 소멸된다하더라도 최고법원빌딩은 피라미드와 같이 여전히 웅대하게 우뚝 솟아 먼 동방예지의 증거로 남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오늘날, 당시의 주변 경치와 건물은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최고법원빌딩은 과거의 웅대한 모습 그대로 우뚝 솟아 시대적 변천사의 증거가 되고 있다.
<홍콩의 역사산책 발췌, 정신표(丁新豹) 엮음>
ⓒ 위클리 홍콩(http://www.weeklyhk.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위클리홍콩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