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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연의 미술도시, 홍콩] [15] 매너리즘에 빠졌나요? 틴토레토의 <노예의 기적>
  • 위클리홍콩
  • 등록 2024-02-23 01:5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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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너리즘’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발전이 필요한 시점에 타성에 젖어 슬럼프에 빠지거나 나태해졌을 때, “매너리즘에 빠졌다”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이 매너리즘이란 표현은 미술 양식을 칭하는 말이었다. 이탈리아어로 규범이나 양식을 뜻하는 ‘마니에라(maniera)’로부터 파생된 이 말은 1520년부터 1590년경까지의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미술 양식에서 비롯되었다. 회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장점을 흡수하여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달성했다고 여겨지는 라파엘로의 사후부터 바로크 미술의 초기 시기까지의 양식을 매너리즘 회화로 분류한다.

 

 2월 28일까지 홍콩 미술관에서 열리는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티치아노와 베네치아 르네상스》 전에서 만나볼 수 있는 틴토레토(Jacopo Robusti/Tintoretto, 1518-1594)의 <노예의 기적(The Miracle of the Slave, also known as The Miracle of Saint Mark>을 통해 이러한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그림1]. 틴토레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지막 화가로 일컬어지면서도, 단순히 이전 시대의 대가들의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았던 위대한 화가로 꼽힌다. 그는 평생 베네치아에 살면서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를 통해 절정에 올랐던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마무리했고 바로크 양식을 선도했다고 여겨진다.


 [그림1] 틴토레토, <노예의 기적/성 마르코의 기적>, 1547–1548

 이러한 틴토레토의 <노예의 기적>은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의 기적 중 하나를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에서 틴토레토는 성 마르코가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주인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는 노예를 구하러 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매너리즘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듯이 매너리즘 미술도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가로 여겨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그들의 회화에서 달성한 조화로움의 양식만을 답습하려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가들의 작품에서 변화를 꾀했지만, 스타일과 기술에만 집착하여 형식적인 요소들을 과장하고 인위적으로 이용한 결과, 회화의 주제나 의미가 퇴색되고 부자연스러운 인물과 공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틴토레토가 <노예의 기적>에서 보여주는 화면 전반에 걸친 긴장감과 분명하지 않은 공간감은 분명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이지만, 단순히 이전 양식을 답습하지 않으며 경직된 표현에서도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 중앙에는 벌거벗긴 채 누워있는 노예와 그 노예의 다리를 잘라내려고 허리를 숙이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터번을 쓴 인물이 노예를 고문하려고 하지만 부러져버린 망치를 들고 황망한 표정으로 있다[그림2]. 노예의 주인은 노예에게 형을 집행하고자 하지만 성 마르코가 하늘에서 내려와 기적을 통해 노예를 구하고 있다[그림3]. 격정적으로 내려오는 성 마르코가 행한 기적으로 일어난 노예를 둘러싼 인물들의 충격과 혼란이 온전히 느껴진다.


[그림2] 노예를 둘러싼 인물들과 성 마르코의 기적으로 부러진 고문 도구들

[그림3]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성 마르코

 틴토레토는 노예와 성 마르코를 그림 표면과 경사지게 배치하여 투시도법적으로 그 길이가 짧아 보이게 만드는 대담한 단축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단축법은 양식상의 과장된 표현이지만 당시 매너리즘을 옹호하던 미술가들은 단축법의 사용이 화가의 숙련된 기교를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노예와 성 마르코 성인의 근육들이 돋보이는 점은 틴토레토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물들이 입고 있는 다양한 옷에서 보이는 화려한 색채는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이며 당대 이 색채를 가장 화려하게 구사했던 티치아노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인물 드로잉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종합하여 르네상스 최고 화가들의 요소를 전략적으로 흡수했다. 

 그러나 틴토레토는 단순히 두 화가의 특징을 흡수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회화 속에 무대 위의 조명과 같은 비현실적인 빛을 사용하고 대담한 단축법을 사용하여 감상자들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 독특한 빛의 사용과 극적인 연출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종교적 영감을 주었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은 르네상스 후기 회화의 대담함뿐만 아니라 성숙함 역시 느껴지게 한다. 혼란한 구성과 거칠고 비전통적인 붓놀림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틴토레토는 <노예의 기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너리즘 회화로 현실 세계의 묘사가 아닌 어딘가 이상하지만 신성한 아우라를 지닌 그림을 만들었다. 안정적이었지만 짧았던 르네상스 시기 이후 찾아온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시대가 요구했던 종교적 환영을 위해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자연적인 세계를 상상해 낸 것이다. 결국, 매너리즘 회화에 빠져 이를 철저히 소화하고 독창적인 화풍을 탄생시킨 틴토레토는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이후의 미술,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PLACE Hong Kong Museum of Art, HKMoA, 홍콩미술관 

 1962년에 개관한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미술관이다. 1991년 침사추이의 빅토리아 하버가 보이는 현재의 건물로 이전 후 1992년 정식으로 개관하였다. 현재 고전과 현대의 다양한 전시와 함께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컬렉션 중 50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칼럼 소개 :  홍콩에서는 가장 큰 아트 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열리고, 세계적인 옥션 회사들이 일 년 내내 프리뷰와 전시를 개최하며, 대형 갤러리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최근 작품을 쉴 틈 없이 선보인다. 그리고 홍콩에는 M+ 미술관과 홍콩고궁문화박물관 등이 위치한 시주룽문화지구, 시대에 상관없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는 HKMoA와 시각예술 복합문화공간인 K11Musea, PMQ, 타이콴 헤리티지, 전 세계의 유명 및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중소형 갤러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은 동서양의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이 살아 숨 쉬는 미술 도시이다. [미술도시, 홍콩] 칼럼은 미술교육자 원정연이 이러한 장소들을 방문하며 전하는 미술, 시각문화, 작가, 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정연

미술사/미술교육을 공부하고 미술을 통한 글쓰기를 강의했습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온·오프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홍콩의 다채로운 시각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미술사 석사 졸업, 서울대 사범대학 미술교육(이론) 박사 수료

- 강남대 교양교수부 강사, 서울대 사범대학 협동과정 책임연구원 및 창의예술교육과정 강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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