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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반환 20주년, 7.1 시위와 홍콩의 우울한 미래
  • 위클리홍콩 기자
  • 등록 2017-07-14 11:29:45
  • 수정 2017-07-14 11: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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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위의 집합 장소 인근의 길거리는 홍콩의 다양한 정치 단체나 사회운동 단체의 전시회장 같다. 비록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하나로 뭉치지 않은 소규모 조직이 ..
시위의 집합 장소 인근의 길거리는 홍콩의 다양한 정치 단체나 사회운동 단체의 전시회장 같다. 비록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하나로 뭉치지 않은 소규모 조직이 다수 존재하는 것이 홍콩의 특징이다.

매년 홍콩 반환 기념일에는 홍콩 및 중국의 민주화를 호소하는 7.1 시위(七一大遊行)는 현지의 정치.문화적 풍물이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 시대 이후 완전한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체제가 뿌리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한편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 왔기 때문에 시위와 사회 운동을 통해 주장을 호소하는 문화가 정착해 있다. 특히 7.1 시위는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홍콩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다.

이 시위는 참가자 수 자체가 홍콩 사회의 대 중국 감정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국정부가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유행한다는 정보를 은폐한 2003년에는 50여만 명이 참가한 반면, 홍콩과 중국관계가 양호했던 2000년대 후반 참가자 수는 4~8 만 명 정도. 또한 우산 혁명 전야의 반중 감정의 고조를 보인 2012~2014년에는 매년 40~50 만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 수는 모두 주최 측 발표).

금년 6월 30일 중국 외교부는 홍콩 반환 후 50년간의 자치를 정한 가운데 영.중 공동선언을 "현실적인 의미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옛 종주국인 영국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보를 보였다. 또한 6월 말 중국 민주운동가 류샤오보가 중국 내 옥중에서 말기 암 진단 사실이 밝혀지면서 홍콩 민주파는 충격에 빠졌고, 홍콩 사회의 대 중국 감정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년 7.1 시위 참가자 수는 6만 명에 그쳐 지난해 11만 명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시진핑이 홍콩반환 20주년 기념식을 위해 홍콩을 방문했던 이 기간 중에는 거리에 긴장감이 감돌았고, 또 당일 때때로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씨도 원인중 하나가 되었겠지만, 그 위에는 홍콩사회를 뒤덮고 있는 두터운 무력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현지의 한 대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2014년의 우산 혁명은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고, 아무리 시위를 해도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 입법위원회 선거나 올해 행정장관 선거에서도 친중파에 유리한 선거 제도 탓에 중국에 불만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정치에 대한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10명 중 6명이 "30 년 후 이민 고려"
홍콩 시민들이 중국 정부에 대한 거부 목소리를 높여도 소용이 없다. 그런 홍콩의 안타까운 분위기를 7월 1일자 현지신문 '애플 데일리'가 게재한 여론조사 기사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중 공동선언으로 정한 '홍콩 고도의 자치'가 50년이 되는 해인 2047년(30년 후)에 홍콩이 어떤 모습이 될 것 같은가, 라는 질문에 홍콩 시민들은 답변과 같이 응답했다.

<홍콩에 진정한 보통 선거가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 하는가?>
· 실현하고 있다 8.4 %
· 실현되지 않고 있다 70%
· 모르겠다 7.2 %
· 보통 선거로 당선 된 인물이 나와도 북경정부가 인정하지 않는다 14.5 %

<홍콩 인구 구성은 홍콩인(반환 전 홍콩 출생자와 그 자손)과 새로운 이민자(반환 후 홍콩으로 이민 온 중국 대륙 출신) 중 어느 쪽이 많아지고 있는가?>
· 홍콩 사람들이 더 많다 9.6 %
· 새로운 이민자들이 더 많다 64.6 %
· 홍콩 사람과 새로운 이민이 반반이다 19.4 %
· 모르겠다 6.4 %

<당신은 2047년에도 홍콩에 살 것인가?>
· 홍콩에 있겠다 17.6 %
· 해외로 이민가겠다 59.5 %
· 중국 대륙에 돌아가겠다 5.2 %
· 모르겠다 17.6 %

현재 홍콩 사람의 대부분은 한때 중국 대륙의 내전과 공산주의화를 꺼려 홍콩으로 도망친 망명자의 후손이며, 자신들의 사회(중국)를 '손절매(損切賣)'하는 것도 이러한 답변과 연결되어 진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강한 실망을 반영한 답변임에는 틀림이 없다.


"홍콩 독립파는 표류 중"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홍콩인은 중국 주권 아래 고급 자치(일국양제)의 틀 내에서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리버럴(자유주의) '민주파'와 중국의 주권을 부정하고 홍콩의 독립을 요구하는 '본토파'(홍콩 독립파)의 두 가지로 나뉜다. 예를 들어, 2014년의 우산 혁명의 중심이 된 학생 운동가 조슈아 웡(黃之鋒·19)이나 아그네스 차우(周庭·19)는 사상으로 다소 민주파 성향이다.

반면 후자의 본토파는 2010년대에 태어난 급진파이다. 온건한 정치 개혁을 요구한 우산 혁명의 실패와 홍콩 사회의 혐중(嫌中) 정서를 배경으로 영향력을 강화했다. 중국을 '지나 (支那)'라고 비하하는 용어로 부르거나 일부 세력이 거리에서 중국인 유커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다소 히스테릭한 측면이 있지만 지난해 입법위원회 선거에서 본토파 계열의 '청년신정'(靑年新政)에 속하는 네이선 로(羅冠聰·23) 와이칭 야우(游蕙禎·25)이 당선되는 등 젊은이를 중심으로 일정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 본토파도 현재는 생각보다 저조하다. 원인 중 하나는 위의 두 의원이 지난해 10월 취임 선서 시 중국을 '지나' 취급 하고 회의장에서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반입하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이 결과 중국 정부가 정치 개입을 하고, 두 의원의 자격을 박탈하며 오히려 홍콩의 정치적 자율성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 홍콩 시민은 "본토파 대표의 입법회 진입을 즐거워하던 만큼 그들의 유치한 행동에 정말 실망했다. 중앙의 개입을 불러서 결국 해고되어 말았다. 홍콩의 독립을 마음껏 주장하기를 바랐는데 전쟁 '입구'에서 쓸데없는 퍼포먼스로 의원으로서 발언 한마디도 못하고 의석을 잃었다. 표를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본토파의 고참 그룹인 홍콩자치운동(香港自治運動)의 구성원인 빈센트 라우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지지자의 절대 수는 적었지만(홍콩 주민의 10% 정도) 꾸준히 세력을 늘려온 본토파는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며 청년 신정의 몰골에 대해 한탄했다.

그는 이어 “조슈아 웡(黃之鋒)의 정당 데모시스토(香港衆志)는 젊지만 청년신정보다 성숙하다.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민주파에 가깝기 때문에 나와는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홍콩 사회 전체를 뒤덮는 가운데 마지막 기대주인 홍콩 데모시스토(香港衆志)의 인기도 그리 높지 않다.

7.1 시위 당일, 경찰이 데모시스토 당원을 향해 "내가 총을 뽑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라고 협박적인 언동을 하거나, 민주파의 사회민주연선(社會民主連線) 주석이 경찰의 발에 차이는 모습이 현지 신문 기자에 촬영되는 등 중국정부의 뜻에 따른 홍콩 당국의 민주파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우산혁명 이후 홍콩 경찰은 분명히 폭력적으로 변했다. 2014년에는 공민당(민주파) 당원들이 경찰에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고, 지난 2월 몽콕 지역에서 소란이 있었을 때는 나의 바로 눈앞에서 경찰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전의 홍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만 일어나고 있다"(빈센트)

2013년 시진핑 정권의 성립 전후로 홍콩의 중국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향후 홍콩은 보통 선거의 도입은 커녕 일국양제의 유지조차도 위태롭게 될 처지에 놓여있다.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인 민주파나 본토파는 생각보다 역량이 부족하고 타개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홍콩은 상당히 어렵다.

중국의 지배에 위화감을 가진 홍콩 사람들은 과연 '이민' 이외의 타개책을 찾을 수 있을까? 2047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결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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