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의 신비 부석사(浮石寺)
신라 문무왕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 이곳은 목조구조 기술의 정수라 일컬으며 건축미의 극치를 자랑하는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이 부석사를 대표하는 수식어이다. 학교 다닐 때의 기억을 곱씹어 보면 국사시간에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지만 막무가내로 외우던 시절이라 그 아름다움의 의미를 가슴으로 알기는 어려웠다.
학교를 졸업한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천년고찰의 신비를 지닌 부석사에 도착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데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고색창연함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도통 역부족이다. 그래서 문화재를 방문할 때는 문화 해설사의 설명이 더욱 진가를 발한다. 국보가 5점, 보물을 4점이나 가지고 있는 부석사에는 국보급 해설사도 함께 있었다. 해설사의 상세한 설명과 안내로 부석사 곳곳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자연과 절묘한 어울림으로 지어진 건축물과 처마 하나, 기둥 하나에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나도 모르는 감탄소리가 절로 나온다.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분주히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울림이 무엇인지,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천년 전 건축물이 귀한 가르침을 전하는 듯하다. 만고의 진리는 불변이라 했던가 현대인에게뿐 아니라 과거에도 이곳을 다녀간 문인들의 부석사를 칭송하는 많은 글귀가 남겨져 있다. 특별히 소백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안양루에 도착해서는 해설사님이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를 들려주었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있네
- 『방랑시인 김삿갓이 부석사에 남긴 시』
함께 방문한 일행들 모두 세계 곳곳에 흩어져 지낸터라 고국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특별히 바로 지금 직접 서있는 곳의 절경을 노래하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이곳저곳에서 일행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진다.
일출 일몰의 천혜절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곳, 의상대사를 향해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가 깃든 곳, 마치 내 맘을 훔쳐본 것 같이 고스란히 읊어놓은 시가 남겨진 곳. 부석사를 내려오며 모두들 하나같이 ‘꼭 다시 와야지’ 하는 약속을 남기는 듯 했다.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
부석사와 더불어 영주를 대표하는 방문지는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알려진 소수서원 이다 부석사가 불교문화를 상징한다면 소수서원은 조선시대에서 중시하던 충,효,예,학이 살아 숨쉬는 유교문화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무너져 가는 교학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국가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 받고,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지칭한다.
오늘날 사립대학과 같은 서원에는 대학 도서관에 해당하는 장서각과 제사용 그릇을 보관해 두던 전사청, 학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 강의실인 강학당 등 기능에 따른 다양한 건축물이 위치해있다. 건물의 구조와 기능을 알고 이곳 저곳을 살펴보면 그 재미가 더욱 배가된다. 강학당에 들어서면 당시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장서각에서는 오래된 고서 냄새가 배여 있는 것 같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 안향선생의 초상화(국보 111호) 앞에서는 절로 숙연해지기도 했다. 소수서원 옆에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을 재현해 둔 선비촌이 조성되어 있는데 선비촌에서는 옛 영주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두었다. 가옥별로 거주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맞는 규모로 구성하고, 가구와 생활도구도 전시해둠으로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직 간접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특별히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했던 놀이 국궁과 투호장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해 즐거워하는 많은 관광객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위클리홍콩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