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은지는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구정 전에는 새해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젠 나도 홍콩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다.
구정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얼른 나가 남편 성(姓)이 새겨진 빨간 봉투를 한 다발 사야하고, 은행에서 잉크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빳빳한 신권도 주문해 놔야 하고, 시어머니의 '수선화를 사다 놓았으니 화분이라도 준비해라'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걸 보니 이제 또 슬슬 구정 스트레스가 쌓인다.
아, 잠깐 잊었는데, 저는 제니퍼이고, 2년 전 여기 위클리홍콩 로사 사장님 따라서 러시아 다녀온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억을 하시는지, 세상물정 모르고 그 비싼 러시아 인형을 한 보따리 샀다가 엉엉 울며 현금으로 돌려달라던… 그리고, 내 남편은 홍콩 사람이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리 시어머니가 금년에는 부쩍 신년 벽두부터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하신다. 신묘년인 올해 토끼띠인 며느리가 너무 걱정인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띠가 같은 해는 좋든 안 좋든 많은 변화가 있다고 믿는다. 어느새 보석방에 부적의 효험이라도 있다고 믿으며 동물문양의 열쇠고리를 주문해 놓고는 나더러 걸고 다니라고 성화를 대신다.
여하튼 홍콩에 첫 발을 디딘 지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다. "홍콩남자 빼고는 다 맘에 든다"고 떠들던 부산여자가, "never say never"란 말처럼 떡하니 홍콩남자와 결혼해서 8년째 이러고 산다. 하루 종일 광동어에 영어, 부산 말에 이젠 만다린까지 떠들어 대는 시끄러운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8년간의 내 결혼생활은 하루가 평온한 날이 없었다.
우리 시댁, 아주 특이한 집안이다. 젊은 시절, 어린 자식(나의 남편)을 두고 과감히 이혼한 시부모님은 그 후 각자 새살림을 차리셨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시아버지와 새 시어머니가 주로 가정대소사를 관리하지만, 홍콩은 어찌된 게 시아버지+새시어머니, 시어머니+새시아버지 이렇게 두 세트의 시부모님이 우리 생활 깊숙이 관여를 하신다. 내 나이 26살부터 이런 생활이 시작됐으니 정말 하루하루 바람 잘 날 없이 그렇게 지난 8년을 살아온 것이다. 어쩌면 내 얘기가 시시콜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홍콩이란 곳에 인연이 되어 사는 모든 분들께 이 홍콩 사람들과 문화, 그리고 사고방식 등을 좀 더 쉽게 공유하면 좋을 듯 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바구 하고자 한다.
(참고로 여기서 자주 등장 할 시어머니는 이혼한 시어머니를 일컫는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홍콩 사람들은 참으로 미신적이다. 맹목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이나 행위들이 어쩌면 매년 반복되는 생에 재미를 더해주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벌써부터 홍콩의 거리나 건물, 집안은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다. 이렇듯 홍콩은 구정이 가까워지면 빨강으로 도색이 되고, 빨간색 옷이라면 주저함 없이 사고 본다. 일반적으로 상당한 자신감이 없으면 입기 힘든 빨간색 옷도 구정 때면 당당하게 입을 수 있게 되고, 거기에 빨간 색 가방도 하나 장만해 볼까 하는 장난기 섞인 생각까지 든다.
또 시어머니가 매년 우리에게 몇 뿌리를 건네 준 수선화의 줄기에 흰색 꽃이 피는 것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수선화 꽃처럼 화사한 웃음이 번진다. 수선화의 은은한 향기와 초록색 줄기에 둘러진 또 "빨간색"의 리본을 보면 올해도 많은 복과 향기가 가득하게 해달라고 빈다.
구정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매화꽃망울과 도도하면서 귀티 나는 난꽃, 그리고 "깟"이라 불리는 귤나무들이다.
또 홍콩의 어른들은 자식이나 손자에게 입힐 중국 비단 옷과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을 준비하는데, 우리나라 풍습과 비슷하기도 하다.
이런 홍콩 풍습을 잘 알면서도 잠자코 지내는 며느리를 한 두해 보아온 게 아닌 시어머니는 벌써 2주전부터 빨간 티셔츠에 십이지간의 올해 주인공인 토끼가 떡 박힌 옷을 보내오셨다.
홍콩에서는 구정 첫날은 시집이나 친정 등 웃어른 집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새해를 축하한다. 자리에 앉기 전에 따뜻한 차가 대접된다. 또 테이블 위에는 한국의 찬합과 거의 비슷한 자개나 목조 그릇 안에 황금빛으로 포장된 사탕과 초컬릿 등이 놓여있어 차와 함께 먹는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홍콩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 대신 "새해 돈 많이 버세요"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한다.
구정을 맞으며 홍콩 며느리로 사는 나나, 여러분들이나 잊지 말고 준비해야할 게 있다. 바로 '신권'이다. 일찍 주문하지 않으면 신권이 다 동이 나서 자칫 헌 돈을 빨간 봉투에 넣어야 하는 불상사기 생기니 말이다. 홍콩에서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빳빳한 새 돈'의 의미가 크다. 그렇기 때문에 헌 돈을 남한테 주는 건 절대 금물이다.
'라이씨'(홍콩말로 새배돈)를 주기 시작하는 날은 바로 구정 당일부터다.
라이씨 주는 방법을 주위에서 많이 묻는데, 시집사람들로부터 들은바로는, "쿵헤이 팟초이(恭喜發財)!"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수위아저씨나 평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준다.
그리고, 결혼을 한 사람들이 미혼의 싱글들에게 준다. 그러나 요즘은 돌싱(돌아온 싱글)도 많아지는 추세라서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당한 고민거리다. 그리고 어른들은 아기들에게, 회사 사장이나 직급이 높은 사람들이 낮은 사람에게 준다.
또 남편이 와이프에게도 주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님님들에게 용돈처럼 주기도 한다. 그래서 구정 때나 구정 이후에 라이씨를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용실이나 뷰티샵 등으로 피신하는 사람도 많다.
구정 2주 이후에는 라이씨를 의무적으로 줄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라이씨를 일년 내내 줘도 무방하다.
홍콩며느리로 살면서 참 다행으로 느껴지는 것 하나는 '제사'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며느리들이 명절만 되면, 명절증후군을 호되게 앓는다는 소식만 들으면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데, 홍콩에서는 구정음식을 따로 만들진 않고, "린고"라고 부르는 설에 먹는 찹쌀떡을 차와 함께 먹으며 대화속에 가족간의 정을 나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설 때 한국을 가보지 못한 나는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제사나물밥에 조기살을 밥 한 숟가락에 얹어 진한 탕국과 함께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다. 최근에는 남편이 나의 맘을 아는지 구정 떡국이라도 먹자며 한국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데, 이렇게라도 향수병을 달래고 살아야지 별수 있나 머….
<제니퍼 김(hongkong5j@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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